1950년대 한국: 전쟁과 휴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하며 6·25 전쟁이 시작되었고,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면서 국제전으로 번졌다.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멈췄지만, 이후로도 남북 간 갈등은 이어졌다.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권력을 강화했고, 전쟁 중이던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처럼 독재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일이 잇따랐다. 1960년에는 자유당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고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38th Parallel marker near the 1st Commonwealth Division area in South Korea
1950년대 전후의 거리38th Parallel marker near the 1st Commonwealth Division area in South Korea사진: Davidson, Trevor Bailey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대통령 80회 생일
1950년대 전후의 거리대통령 80회 생일사진: 한국정책방송원 · KOGL Type 1 · Wikimedia Commons
석가탄신일 연등행사 (1958)
1950년대 전후의 거리석가탄신일 연등행사 (1958)사진: 한국정책방송원 · KOGL Type 1 · Wikimedia Commons
Australian, Swedish and Swiss soldiers watch football match
1950년대 전후의 거리Australian, Swedish and Swiss soldiers watch football match사진: Hobson, Phillip Oliver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경주 포석정 (1959)
1950년대 전후의 거리경주 포석정 (1959)사진: 한국정책방송원 · KOGL Type 1 · Wikimedia Commons

해마다

1950년의 한국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정부는 대구와 부산으로 피란했다.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되찾고 북진했으나 10월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뒤집혔고, 연말 흥남 철수로 수많은 피란민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1951년의 한국

중국군의 공세로 1·4 후퇴가 이뤄져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가 3월에 되찾았고, 이후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교착됐다.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됐으나 전투는 계속됐으며, 거창 양민 학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 전쟁 중의 참상과 부패가 드러났다.

1952년의 한국

전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피란 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밀어붙인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났다. 8월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이 재선됐고, 평화선 선포와 첫 지방선거, 거제도 포로수용소 소요 등이 이어졌다.

1953년의 한국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며 3년 넘게 이어진 전쟁의 포성이 멎었지만, 한반도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둔 분단 상태로 남았다. 이에 앞서 이승만 정부는 반공포로를 석방해 휴전에 반발했고, 10월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화폐 단위가 원에서 환으로 바뀌고 근로기준법이 제정되는 등 전후 재건의 틀도 마련되기 시작했다.

1954년의 한국

휴전 이듬해로 피란민의 귀향과 전후 복구가 이어졌다. 5월 총선에서 다수를 차지한 자유당은 11월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애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다. 독도 등대 설치, 한국일보 창간과 첫 민간 방송 CBS 개국, 한국 축구의 첫 월드컵 출전 등도 있었다.

1955년의 한국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한 반이승만 세력이 모여 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여야 양당 구도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정부는 일본 제품 수입을 제한하는 등 대일 강경 노선을 이어갔고, 한글 간소화 파동이 철회됐다. 홀트 부부의 전쟁고아 입양을 계기로 해외 입양이 본격화했고, 영화 「춘향전」은 침체한 영화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56년의 한국

5월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후보 신익희가 유세 중 급서했고, 이승만이 3선에 성공했지만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됐다. 9월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과 11월 진보당 창당 등 정국의 긴장이 이어졌고, 한국 최초의 TV 방송국 개국과 영화 「자유부인」 흥행, 아시안컵 우승 등 새로운 대중문화의 바람도 불었다.

1957년의 한국

전후 원조 경제 속에서 비교적 안정된 해였지만, 자유당 정권과 야당의 대립은 계속돼 장충단 공원 야당 집회가 정치 테러로 방해받았다. 어린이 헌장이 선포되고 『큰 사전』이 완간됐으며, 7월에는 주한 미군 사령부가 새로 설치됐다.

1958년의 한국

이승만 정부 말기로, 진보당 간부 검거와 제4대 민의원 선거, 연말의 국가보안법 개정안 강행 처리(2·4 보안법 파동)로 여야 대립이 격화되었다. 한편 금성사가 설립되는 등 전자 산업의 첫걸음도 시작되었다.

1959년의 한국

자유당 정부가 경향신문을 폐간시키고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는 등 정치적 긴장이 높아졌다. 추석에 상륙한 태풍 사라는 정부 수립 이후 최대의 자연재해로 기록되었고, 연말에는 재일 조선인 북송선이 처음 출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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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진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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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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