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한국: 전쟁과 휴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하며 6·25 전쟁이 시작되었고,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면서 국제전으로 번졌다.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멈췄지만, 이후로도 남북 간 갈등은 이어졌다.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권력을 강화했고, 전쟁 중이던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처럼 독재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일이 잇따랐다. 1960년에는 자유당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고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해마다
1950년의 한국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정부는 대구와 부산으로 피란했다.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되찾고 북진했으나 10월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뒤집혔고, 연말 흥남 철수로 수많은 피란민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 1월 12일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한반도를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선언을 발표했다.
- 5월 30일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 6월 25일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51년의 한국
중국군의 공세로 1·4 후퇴가 이뤄져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가 3월에 되찾았고, 이후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교착됐다.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됐으나 전투는 계속됐으며, 거창 양민 학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 전쟁 중의 참상과 부패가 드러났다.
- 1월 4일중국군의 공세에 밀려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내주고 후퇴했다(1·4 후퇴).
- 2월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이 공비 토벌을 명목으로 주민들을 학살한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 3월 15일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다시 되찾았다.
1952년의 한국
전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피란 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밀어붙인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났다. 8월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이 재선됐고, 평화선 선포와 첫 지방선거, 거제도 포로수용소 소요 등이 이어졌다.
- 1월 18일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령으로 한반도 주변 해양에 대한 주권을 선언하는 평화선을 선포했다.
- 4월 25일첫 지방선거로 시·읍·면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 5월정부가 부산 등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의원들을 체포하는 등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났다.
1953년의 한국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며 3년 넘게 이어진 전쟁의 포성이 멎었지만, 한반도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둔 분단 상태로 남았다. 이에 앞서 이승만 정부는 반공포로를 석방해 휴전에 반발했고, 10월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화폐 단위가 원에서 환으로 바뀌고 근로기준법이 제정되는 등 전후 재건의 틀도 마련되기 시작했다.
- 1월 9일여수에서 부산으로 가던 여객선 창경호가 다대포 앞바다에서 침몰해 300명 안팎이 숨진 것으로 추정됐다.
- 2월 17일화폐 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바꾸는 화폐 개혁이 단행돼 100원이 1환으로 교환됐다.
- 5월 10일근로조건의 최저 기준을 정한 근로기준법이 제정됐다.
1954년의 한국
휴전 이듬해로 피란민의 귀향과 전후 복구가 이어졌다. 5월 총선에서 다수를 차지한 자유당은 11월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애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다. 독도 등대 설치, 한국일보 창간과 첫 민간 방송 CBS 개국, 한국 축구의 첫 월드컵 출전 등도 있었다.
- 5월 20일제3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가 실시돼 자유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 6월 9일장기영이 인수한 신문이 제호를 바꿔 《한국일보》로 창간됐다.
- 8월독도에 처음으로 등대가 설치됐다.
1955년의 한국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한 반이승만 세력이 모여 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여야 양당 구도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정부는 일본 제품 수입을 제한하는 등 대일 강경 노선을 이어갔고, 한글 간소화 파동이 철회됐다. 홀트 부부의 전쟁고아 입양을 계기로 해외 입양이 본격화했고, 영화 「춘향전」은 침체한 영화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 6월 20일정부가 일본 제품의 특혜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 9월대구매일신문 주필 최석채의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가 문제가 되어 자유당 간부 등이 신문사를 습격했다.
- 9월 18일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한 반이승만 세력이 모여 민주당을 창당했다.
1956년의 한국
5월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후보 신익희가 유세 중 급서했고, 이승만이 3선에 성공했지만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됐다. 9월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과 11월 진보당 창당 등 정국의 긴장이 이어졌고, 한국 최초의 TV 방송국 개국과 영화 「자유부인」 흥행, 아시안컵 우승 등 새로운 대중문화의 바람도 불었다.
- 5월 5일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호남 유세를 위해 열차로 이동하던 중 숨졌다.
- 5월 15일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재선됐고,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됐다.
- 8월 15일장면이 제4대 부통령에 취임했다.
1957년의 한국
전후 원조 경제 속에서 비교적 안정된 해였지만, 자유당 정권과 야당의 대립은 계속돼 장충단 공원 야당 집회가 정치 테러로 방해받았다. 어린이 헌장이 선포되고 『큰 사전』이 완간됐으며, 7월에는 주한 미군 사령부가 새로 설치됐다.
- 3월 9일강원도 영월과 함백을 잇는 탄광 철도 함백선이 완공됐다.
- 5월 5일어린이를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을 담은 어린이 헌장이 선포됐다.
- 5월 25일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야당 시국강연회가 괴한들의 테러로 중단됐고, 경찰은 이를 방관했다.
1958년의 한국
이승만 정부 말기로, 진보당 간부 검거와 제4대 민의원 선거, 연말의 국가보안법 개정안 강행 처리(2·4 보안법 파동)로 여야 대립이 격화되었다. 한편 금성사가 설립되는 등 전자 산업의 첫걸음도 시작되었다.
- 1월 12일경찰이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일제히 검거하기 시작하며 진보당 사건이 시작됐다.
- 2월 16일부산발 서울행 대한국민항공사 여객기 창랑호가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됐다.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 납치 사건이다.
- 5월 2일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1959년의 한국
자유당 정부가 경향신문을 폐간시키고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는 등 정치적 긴장이 높아졌다. 추석에 상륙한 태풍 사라는 정부 수립 이후 최대의 자연재해로 기록되었고, 연말에는 재일 조선인 북송선이 처음 출항했다.
- 4월 30일정부가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에 폐간 명령을 내렸다.
- 7월 31일진보당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그는 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 9월 17일추석날 태풍 사라가 부산 부근을 지나며 사망·실종 849명의 피해를 냈다.
옛 사진 아카이브
출처·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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